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6호 영화
그들은 다른 세상을 만든다
굿바이 레닌(Good Bye, Lenin!) 독일/118분/감독 울프강 벡커

공미연  
조회수: 3321 / 추천: 63
1989년. 20세기 최고의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전세계 지구인들은 그 사건을 집에서 한편의 영화처럼 보았고, 그 사건으로 이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게될 한반도 사람들은 조금은 충격과 감동과 아무튼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 철거와 동서독 통합 프로세스가 시작된 그 1989년. 난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베를린 장벽 철거엔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도 평양축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밀입국’을 감행했던 임수경에 대해서는, 판문점을 통해 절대로 넘나들 수 없는 38선을 넘어서 ‘귀국’하는 그녀에게 온갖 욕을 퍼부었을 지도 모른다. 도로변 담장에는 임수경을 욕하는 낙서들이 즐비했다. 베를린 장벽의 숱한 낙서같지는 않았지만. 난 꿈 많은! 고3이었고, 그렇게 세상은 돌아가고 있나 보다 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베를린 장벽 철거와 거짓말의 시작

한편 평범한 동독 청년 알렉스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겪었을까? 아버지의 서독망명 이후 열렬한 사회주의자에다 애국자로 활약하는 어머니를 둔 알렉스는 1989년 베를린 장벽 철거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충격으로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코마상태에 빠진다. 어머니가 코마상태에 빠진 동안 알렉스 역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서독 자본주의가 ‘매미’처럼 강타한 동독의 곳곳엔 회사는 문을 닫고, 동독상품들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완전히 물갈이된다. 알렉스 어머니가 눈 한번 감았다가 뜬 순간,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은 완전히 변한 것이다. 깜짝이야!.
8개월만에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또다른 작은 충격도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알렉스는 고심하게 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머니가 믿어 의심치 않던 한 세계가 완전히 사라진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알렉스의 새빨간 거짓말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단 한번이라도 거짓말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난 물론 수없이 거짓말을 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다. 거짓말은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거다. 거짓말을 끝내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일밖엔 없는데 그것이 힘들어서 거짓말을 시작했으므로 어찌 다시 진실을 고려할 수 있단 말인가.
부모님들은 거짓말은 안된다고 가르치며 거짓말하면 딸꾹질을 한다는 둥 전혀 과학적으로 근거없는 이야기들을 퍼뜨리며 아이들의 거짓말을 잠재우려 하지만,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은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그 수위는 더욱 높아가고 홀로 무술을 연마하는 무술인처럼 내공을 쌓아나간다.

거짓말로 완성되는 ‘정말 아름다운 세상’

알렉스의 우발적인 거짓말은 처음엔 집의 구조를 이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리는 것부터 시작되지만, 나중엔 미디어를 통한 ‘세뇌’작업으로 이어진다. 다행히 그의 옆엔 영화감독이 꿈인 동료가 있고, 그의 힘을 빌려 어머니가 꿈꾸던 세상을 가짜 뉴스를 통해 만들어 나간다. 어머니가 존재하는 집은 이 세상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가상공간이 되고 만다. 어머니는 그 가상공간에서 그것이 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현실에 갇혀 실현되기 힘든 꿈을 사람들은 가상공간이라는 탈출구를 통해 빠져나간다. 그것은 사이버세계에 존재하기도 하고, 디즈니 랜드 같은 놀이공원에서, 영화 셋트장 같은 다양한 곳에서 실현된다. 그것을 만들거나 체험하는 사람들은 가짜세계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 속에 머무르는 동안은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어쩌면 현실인 척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가상공간엔 적당한 거짓말이 유용하게 쓰이기도 하고, 진실을 모르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곳에 머무르고 있나? 지금 알렉스가 머물고 있는 곳은 어디쯤 있는 걸까, 정작 베를린 장벽 철거 시위에 나섰던 그가, 어머니의 목숨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는 동안 그 거짓말 속에서 자신이 꿈꾸는 세계, 어머니가 원하던 동독의 모습을 발견해 나간다. 알렉스가 마지막으로 어머니에게 보여주는, 그것으로 모든 거짓말이 완성되는 특집 뉴스는 ‘정말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장 이상적인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다.

...그러나 상상력마저 가둬버리는 현실

내가 태어날 수 있는 세상을 정할 수만 있다면, 우린 이렇게 힘들거나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그것이 가능하지 않은 현실이라면 다른 세상을 꿈꾸고 실현할 자유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아 현실은 왜 이리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일까, 겨울이라 그런가? 아니다.
<굿바이 레닌>이 개봉되고 있는 지금, 영화가 만들어진 독일에서 온 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구속상태다. 집회 시위를 할 공간조차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는 지금. 분단은 몸을 가두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까지도 가두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한다. 이런, 저절로 한숨이 나올 때, 뭘 해야 하지, 크게 한번 웃어볼까, 웃다가 눈물이 날 지경이다. 이럴 때는 우리도 거짓말을 해보자, ‘다 잘 될 거예요.’ ‘내일은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P.S. 영화를 보고 열심히 웃었다.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다. 그러다 마지막엔 슬퍼졌다. 마음 한 구석에 묻혀있던, ‘내가 꿈꾸는 세상’을 잊고 있었다는 자책감 같은 거였다. 바보같이, 잊을 걸 잊어야지, 그런걸 어디다 두고 다니는지... 그래서 다시 끄집어 내본다. 내놓고 다니면 조금은 희망이 생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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