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7호 칼럼
‘하리수’라 불릴 권리, 부를 권리

김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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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수는 시청자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사람들은 각종 텔레비전이나 방송에서 하리수를 보거나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을 갖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또한 ‘하리수’라는 이름이 일정한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다면 그 가치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최근 하리수라는 예명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 법적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들 접하면서 든 생각이다. 위 논쟁의 핵심은 하리수와 소속 기획사 간의 전속계약이 종료된 후, 하리수가 계속해서 자신의 예명을 사용할 권리가 있는지, 아니면 기획사가 그 권리를 갖고 있으며, 또 다른 가수로 하여금 그 예명을 사용하게 하는 것도 가능한지의 문제다.

이 문제는 하리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처럼 기획사가 중심이 되어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스타제조시스템을 통해 유명가수로 키워내는 체제에서는 계속 불거져 나올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우선 이 문제를 이익조정의 문제로만 바라보려는 시각이 있다. 어차피 연예인의 예명이 일정한 경제적 가치를 갖게 되었다면, 그러한 가치를 창출한 사람에게 그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고이다. 그래서 만약 기획사의 기획과 투자가 오늘의 하리수를 만들어 냈다면 그 예명에 대한 권리도 마땅히 기획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도 반론이 만만치 않다. ‘하리수’라는 이름의 값어치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재능과 열성에 대한 대가일 수밖에 없고, 설사 기획사가 많은 투자를 했다 하더라도 그 투자에 대한 대가는 전속기간동안의 이익분배를 통해서 보장받으면 족하지, 전속계약이 종료된 후 예명에 대한 권리까지 인정할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아무리 가수의 예명이 상업적 가치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가수의 인격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하리수’는 그만의 노래와 춤, 음색과 행동양식 등 모든 것을 표창(表彰)한다. ‘하리수’를 말할 때 누구나 다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떠올리지만, 그것 또한 하리수가 갖고 있는 중요한 인격의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하리수는 헌법상 보장된 인격권으로서 여전히 ‘하리수’로 불릴 권리가 있는 것이다. 소비대중의 입장에서도 역시 같은 문제가 있다. ‘하리수’라는 이름의 경제적 가치는 대중의 호감이나 지명도에 근거한다.

그런데 대중의 호감이나 지명도는 하리수라는 인격체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기획사가 또다른 가수를 ‘하리수’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게 한다면, 이는 대중으로 하여금 기존의 하리수가 남긴 느낌과 호감도를 갖고 신인가수를 바라보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이는 결국 대중의 착각을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때문에 상표법에서도 상품의 품질을 오인하게 하거나 수요자를 기만할 염려가 있는 상표는 상표등록을 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에 상표를 붙이듯 기획사가 연예인의 예명을 제2, 제3의 연예인에게 붙인다면 이는 연예인의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소비대중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우리에게도 하리수를 ‘하리수’라 부를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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