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호 사이버
클릭과 함께 사라지는 여성 '망명자들'

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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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한 진보' 한다는 사이트에 들어간다. 하루에 20-30개씩 글이 올라오고 다음날이 되면 평균 조회수가 100을 육박하는 게시판. 이곳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성폭력 사건이다. 몇몇 글들을 읽어본다. 아, 정신건강에 해로워. 나는 한숨을 쉬며 얼른 마우스를 클릭해 다른 사이트로 옮겨간다. 몇 년 전만 해도 눈에 불을 켜고 모니터 앞에 붙어 앉아 가부장적 사고방식을 드러내는 글들을 일일이 캡쳐하고 출력하여 밑줄 쳐 읽어서라도 밤새 반박글을 올렸을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나는 나와 비슷한 여성 네티즌들이 결코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장 내 주변만 봐도 그렇다. 최근 대학 강사의 여성 비하 발언을 둘러싸고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진 논쟁을 보며 한 여자친구는 그 게시판을 너무 지긋지긋해 한다. 언제까지 인생을 '똥 치우는 데' 허비해야 하냐는 거였다. '진보' 인사로 불리는 지식인을 살짝 비판했다가 사이버상에서 온갖 매도를 당하고 있는 다른 여자친구는 쏟아지는 비난의 메일이나 게시판 글들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일일이 대응하다 보면 '일상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사람들은 무책임하다고들 난리지만, 정말로 '일상이 파괴되어 본' 나로서는 그녀의 심정 백 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긴, 이렇게 구구절절 주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 유명한 '군가산제 논쟁(?)'만 보더라도, 젠더 이슈에 대한 사이버 '논쟁'이라는 게 대충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극렬 페미'로 찍혀 집중공격이나 안 받으면 다행인 것이다.
이처럼 사이버논쟁에서 여성비하가 서슴없이 자행되고, 좀 점잖아 봤자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시지' 라는 남성 네티즌의 팔짱낀 태도가 횡행하는 것은 왜인가? 혹시 논쟁의 '룰'과 '문화'가 그것을 용인하기 때문은 아닐까? '논쟁에 적합한 말하기 방식'이 여성 경험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는지도 의문일뿐더러, 점잖은 논객과 사이버 마초가 공존하는 게시판에서는 그나마 '룰'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다. 사이버 마초들은 논쟁의 룰을 지키지 않으면서 논쟁에 조직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놈들은 무시해버려"라고 말하며, 실제로 많은 점잖은 남성 네티즌들은 그들을 무시한다. 그러나 '무시'할 수 있는 것, 영향 받지 않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권력이다. 권력관계의 약자는 권력을 '무시'할 수가 없다. 여성의 입장을 드러낸 네티즌들은 이들로부터 직접적으로 공격당하거나 간접적으로 축출 당한다("이젠 아예 그 게시판에 들어가기가 싫어").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는 그래도 클릭 한번으로 '나와버릴' 자유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그렇다면 현재의 사이버 공간에서 보장되고 있는 것은 '누구의' 표현의 자유인지?
물론 지금도 열정적으로 논쟁하고 있는 여성(그리고 극소수의 남성) 네티즌들이 존재하며, 나는 그녀들이 다치지 않기를, '일상이 파괴'되지 않기를, 좀 더 오래 버텨내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그렇지만 사실 그녀들의 건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사이버 논쟁의 '룰'과 '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클릭과 함께 사라진 여성 '망명자들'이 표현의 권리를 되찾을 때까지, '표현의 자유'는 젠더화된 사이버 공간에 갇힌 미완의 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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