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호 김칠준의
내겐 정보인권헌장이 필요하다.

김칠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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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보인권이라는 말을 부쩍 자주 듣는다.
명색이 변호사로서 여기저기 다니며 인권을 외치거나 강의하고 있지만 정보인권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는다. 물론 인권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받을 권리이자 행복을 추구할 권리이고, 차별 없이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역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를 의미한다는 것은 잘 안다. 그래서 정보인권이란 정보화 사회나 사이버세상에서도 이런 권리들이 온전히 보장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라고 짐작은 한다.

그러나 왠지 허전하다.
그 동안 오프라인 세상에서 인권을 말할 때에는 특정 사안에서 어떤 인권이 어떻게 침해됐느냐를 두고 논란을 벌였지만, 그래도 늘 나의 머리 속에는 우리가 지향하는 인권세상이나 사람 사는 모습을 그려두고 있었다. 하지만 정보인권을 이야기할 때에는 정보화 사회에서 내가 추구해야 할 인권의 상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지금 정보인권은 표현의 자유, 자기정보통제권과 반감시권, 정보접근권과 정보공유권 등 다섯 개의 영역에서 치열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런데 각각의 영역에서 인권활동가로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으로서의 사이버 인권세상의 모습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프라인 세상의 인권문제에 익숙해 있는 나로서는 이것이 내내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구체적인 사건들을 접하면 내 머리 속은 더 복잡해진다.
정보사회는 우리에게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온갖 종류의 콘텐츠나 표현물을 접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그만큼 정보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의 세부적인 내용은 정보사회에서도 여전히 엄격하게 적용돼야 한다. 사전검열이 허용돼서는 안되고, 사후통제라도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없는 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불온'하다거나 '유해'하다는 애매모호한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인터넷 실명제도 그것이 실행될 경우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기반을 흔들어 버리기 때문에 허용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까. 인터넷 신문이나 각종 사이트의 게시판에 수없이 올라오는 글들, 특히 실명을 거론하면서 온갖 욕설과 폭언을 퍼붓는 글이나,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사실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 글들을 볼 때마다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다. 사실이 확인되지도 않는 내용들이 아무런 여과도 없이 저렇게 인터넷에 떠다녀도 되는 걸까. 물론 사이버세상에서는 표현의 자유의 페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그 표현물들이 편집자도 없이 대중에 의해 직접 생산되고 유통된다는 점과 대자본이 독점하고 있는 기존 언론에 대항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보다 관대해질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큰소리칠 자신이 없다.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개진하려고 쓴 글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 폭언과 욕설이 난무하거나 타인의 사생활을 까발림으로써 회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면 어쩔 것인가. 그런 글을 올리는 사람에게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할텐데 익명의 네티즌을 찾아내서 책임을 묻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사이트 운영자에게 그런 글을 찾아내서 지우도록 법적인 책임을 부여한다고 해도 많은 네티즌들이 한꺼번에 이런 글들을 쏟아낼 때는 운영자가 그 모든 글들을 찾아서 지우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인가. 혹시 운영자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제때 발견하지 못한 사이에 그 글이 무명의 네티즌들에 의해서 순식간에 인터넷으로 번져갔다면 운영자에게 그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러기에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제한을 둬야하고, 근원적으로는 그런 글을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인터넷 실명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우길 때, 나는 무엇을 근거로 'NO'라고 대답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이런 피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찾아와 하소연한다면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가. 그에 대한 명쾌한 답으로서의 정보인권헌장이 내겐 필요하다.

정보인권을 실천해 나감에 있어서 판단의 어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천이 생활화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개인정보는 원칙적으로 수집이 제한되고, 사용목적에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안에서만 수집, 보관돼야 한다. 그리고 정보주체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헤프게 나의 정보를 제공했다. 인터넷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할 때마다 왜 필요한지 따져보지 않은 채 나의 신상정보를 고스란히 기재하였고, 민원을 처리할 때에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묻는 대로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주곤 했다. 나와 다른 사람의 실천이 이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반감시의 제도화는 요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내겐 일상의 실천지침으로서의 정보인권헌장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우리는 정보접근권에 대한 인식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이 정보에 대해 자유롭고 평등하게 접근할 권리가 있으며, 정부는 복지의 일환으로 보편적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정보통신을 이용할 수 있는 물리적인 장치와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기술교육을 제공하며, 성별, 연령, 지역, 직업, 장애여부와 상관없이 정보화의 혜택을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정부의 시혜적인 조치가 아니라 우리의 각성과 당당한 요구에 의해 실현돼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인식부족으로 인해 이러한 정보복지는 출발점에도 서있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에겐 정보도 '복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정보인권헌장도 필요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손으로 정보인권헌장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정보인권의 감수성이 반영돼야 한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도 명쾌한 해답을 끌어낼 수 있는 정보인권의 원칙을 담아야 하고, 누구나 다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을 담아야 한다. 여유 있는 사람들의 자유권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정보복지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회권으로서의 정보인권을 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정보인권이 실현되는 세상의 참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정보인권헌장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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