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8호 메신저
공개된 일기, 부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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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초등학교에서는 일기를 방학숙제로 내준다고 한다. 방학숙제 목록을 찾아보니 간혹 영어일기를 쓰는 곳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일기 자체가 숙제인 것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일기를 제대로 써내 본 기억이 없다. 항상 방학이 끝나기 몇 일전에 비슷한 폼을 만들어 놓고 몇 자만 바꿔서 채우곤 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방학 5일 째다. 아 신난다.’, ‘개학 5일전이다. 아쉽다’ 이 안에 숫자만 바꾸면 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일기를 쓴 적이 없다.

요즘 인터넷에는 개개인의 사적인 일상들이 구석구석을 메우고 있다. 그 일상들은 텍스트뿐만이 아니라 그림, 사진, 만화, 노래, 아바타 홈페이지, 사이버랩 등 점점 그 모양도 다양해지고 있다. 영화를 볼 때마다 자신의 공간에 감상을 남기는 사람, 음악을 듣고 느낌을 적어두는 사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기록해두는 사람, 만나는 사람들과 주변의 사소한 것들을 사진으로 올려두는 사람. 이들은 각자의 공간에 독립 출판을 하는, 새로운 개념의 평론가이고 시인이고 수필가, 사진작가들이다.

미니홈피나 블로그가 보편화되고 일상화 되어버린 혹은 유행이 된 시대에, 단지 아무거나 글로 쓰면 되는 일기를 숙제로 낼 필요가 있을까? 의미는 원래 그렇다 치고 더 이상 교육에 포함될 명분이 있는지 조차 모르겠다. 이제는 사진을 좋아하는 아이는 사진으로,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는 그림으로, 노래로, 시로, 그렇게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성찰할 각자의 언어를 찾게 도와주는 것으로 대체해야 할 것이다.

나도 1년 전부터 내 홈페이지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투명한 사생활을 지향한다’라는 말까지 꺼내고는 1년 동안 백 개가 넘는 글을 써왔다. 일기라고는 초등학교 때의 몰아 쓴 방학숙제가 전부인데 처음 일기를 써서 홈페이지에 정리하다보니 여러 사람들이 나의 일상들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그날그날 보았던 것, 들었던 이야기, 떠오른 생각, 감정, 느낌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보여주었다. 내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는데, 요즘 문제가 생겼다.

글을 올리다보면 관계도 보이게 된다. 내 이야기를 쓰다 보면 나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빠질 수 없는데 그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몇 일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연애를 하면서 느낀 감정, 생각, 고민들을 홈페이지에 올렸고 헤어진 뒤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 부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편지를 쓰다 멈칫한 것은 내 주변 사람들 뿐 아니라 그녀의 주변 사람들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투명한 사생활을 지향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가 나의 사생활이고 어디까지가 그녀의 사생활인지. 당연히 선을 그을 수가 없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불편해 할 것 같아서도 그렇지만, 그녀의 사적인 정보를 동의 없이 주변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 같이 느낄까봐 글을 못 쓰고 있다.

인터넷에 올리는 일기, 블로그는 다양한 표현의 형식을 가능케 해준다. 하지만 어디까지 얘기할 수 있을까. 노트에 쓰는 일기만 못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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