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8호 만화뒤집기
<딜버트>와 <홍대리>

김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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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을 받는 월급쟁이라면 회사에 3백만 원은 벌어줘야지. 그래야 회사가 유지된단 말이야.” 옛날 옛적에 다니던 회사의 사장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바 있다. ‘아하! 그래서 당신이 사장 역할을 맡으셨군요? 한 푼도 못 벌어오는 유일한 직원이니까요!’라는 대답이 내 목구멍까지 올라오고 있었으나, 그 달 월급은 받아야하겠기에 꾹꾹 눌러 참았다. 그래봤자 끝에는 1년 치 월급을 못 받고 떼였지만.

적어도 3백만 원은 회사에 들어가 줘야 가까스로 1백만 원이 내 주머니에 떨어진다는 현실. 정치경제학 용어로, ‘착취율’이 1:2인 셈이다. 야근까지 해서 모아 온 2백만 원 가까운 생돈이, ‘자본의 자기 증식’에 동원된다. 그래봤자 회사가 ‘축! 발전’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겨우 연명이나 할 따름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을 ‘앵벌이’로 만든다.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회사도 살려야 하다니.

고단한 월급쟁이의 삶을 그린 만화로 <딜버트>와 <홍대리>만한 작품이 없다. 양자 모두 희대의 걸작이다. 그런데 둘이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은 조금 다르다. ‘딜버트’의 보스(boss)는 천하의 멍청이로 나온다. 견공(犬公) 독버트의 말에 매양 휘둘리는 처지이다. 반면 ‘홍대리’의 부장은 정이 가는 양반이다. 독자는 때때로 연민을 품는다. 40-50대 돌연사가 특히 잦은 이놈의 나라에서, 홍대리를 쪼는 부장은, 단지 자본의 인격화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그의 노동 역시 즐겁지 않다.

스콧 아담스는 직장 생활에 신물을 느껴 회사를 때려 치고 <딜버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홍윤표 작가는 회사를 다니며 시간을 쪼개 <홍대리>를 창조했다. 전자는 이미 어찌 할 수 없어서 떠나온 세계를 그렸고, 후자는 피곤한 세계를 그래도 떠안아 보고자 노력한다. 그래서일까? 딜버트는 차갑고 홍대리는 따뜻하다. 옛날에는 딜버트를 더 좋아했는데, 지금은 홍대리의 마음씀에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두 만화 모두 현재를 충실히 그려낸다. 그러나 미래를 꿈꾸지는 않는다. 상상 속의 미래 말이다. 따로 먹여 살릴 회사가 없다면 노동이 훨씬 즐거워질까? 즉, 사회적 차원에서 회사를 관리하면 어떨까? 공동의 작업장에서 다들 필요한 만큼 벌어 가면 어떨까? 생산수단으로서의 회사를 사회화한다면,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지한다면 인생이 즐거워지지 않을까?

이것은 불온한 상상이다. ‘부시 대통령께서 들으시면 큰일날 말씀’이다. 그러나 나 혼자 머리 속으로 꾸는 꿈을 그들이 어찌 말리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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