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9호 표지이야기 [네트워커·언니네 공동기획‘정보인권과 여성’]
Reset, ‘표현의 자유’ : 사유의 공간을 되찾기
서로 다른 ‘익명성’… 때로 남성들의 ‘표현’은 여성들에게 ‘폭력’이된다

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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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심심찮게 뭔가 애초부터 잘못되어 있는 질문을 만나게 된다. 정치적 소수자, 사회적 약자, 피억압 집단에게 이런 일은 흔하다. 어떻게 대답해도 꺼림칙할 수밖에 없는 질문. 오해로 미끄러질 여지가 너무 많아서 뭔가 제대로 된 이야기라고는 거의 해볼 수도 없는 논의 구도. ‘표현의 자유’ 이슈 역시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성주의자들 중에서 표현의 자유 이슈에 대해 명쾌한 단답형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은 이 점을 예증한다. 왜냐면 나/우리는 ‘표현의 자유’라는 단어 뒤에 바글대고 있는 온갖 지리멸렬한 것들을 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이버 마초들의 폭력적인 도배질, 성폭력적인 게시물들, ‘예술이냐 음란이냐’라는 싸구려 마케팅까지 만들어 낸 여성 비하적인 문학, 영화, 음악 - 온라인/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런 것들 말이다. 휴~.

‘익명성’ 뒤에 숨어있는 남성 폭력
이러한 표현의 ‘폭력’들은, 애초에 표현의 자유가 누구에게/왜 요구되었는가 라는 질문(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진정 의미 있는 슬로건으로 만들기 위해 항상 환기되어야 할 요건이다)을 잊은 채 그 단어에 너무나 쉽게 편승했고, 앙상한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폭력’을 용인하고 정당화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져 왔다. 너무 일상적인 폭력은 당연하게 여겨지거나 어쩔 수 없는 일로 여겨지기 쉽다. 여성들이 경험하는 ‘표현의 폭력’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토록 만연하는 표현의 폭력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골몰하다보면, 여성들이 얼마나 표현의 자유를 제약받아 왔는지, 도둑맞은 권리를 정말 향유할 수 있으려면 어디부터 무얼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말도 못 꺼내게 되는 것이다. 사유의 공간 자체가 이렇게 비좁은데, ‘표현의 자유’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최근 인터넷 실명제를 둘러싼 논의 또한 이런 각도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현재 정부의 인터넷 실명제 도입에 반대해 온 사회단체들은 국가에 의해 강제되는 실명제가 민주주의를 위축시키고 비판과 약자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없앨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익명권’을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 논의에서 표현의 폭력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익명권’이라는 단어에서 내가 가장 먼저 연상하게 되는 것은 그 익명성에 숨어서 가해지는 남성 폭력인걸 어쩌랴.

남성들의 ‘표현’, 여성들에게는 간접적 ‘검열’
익명성이 하나의 ‘권리’로서 옹호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 언어, 행위양식에 켜켜이 각인된 성별권력관계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말하는 것’ 외에 별다른 권력자원을 갖지 못한 사회적 약자의 ‘익명성’과, ‘말 한마디’ 만으로 프라이버시 침해, 사이버 성폭력, 사이버 명예훼손, 온라인 검열 등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배 집단의 ‘익명성’이 같은 의미일 수 없다. (과거 여자친구의 연락처, 신체특징, 성 경험 등을 속속들이 공개하는 익명의 글들을 떠올려 보라) 남성에게 익명성이 개인의 책임 없이 남성집단에 부여된 권력을 향유하는 것이라면, 여성에게 익명성은 때로 그것 없이는 표현 자체를 봉쇄 당하는 절박한 권리다.

십 년 전 수잔 헤링은, 남성을 비롯한 지배집단 구성원들은 익명이건 아니건 네트워크상의 의사소통에서 모두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많은 여성들은 익명일 때 비로소 좀더 자유롭게 의사소통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밝혀냈다. 그러나 이 연구결과만큼이나 의미심장한 것은, 10년 전에 발표된 이 연구결과가 아직도 전혀 시대착오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별불평등이 구조화된 가부장제 사회에서, ‘표현’은 남성집단에 의해 지배되고 ‘표현’의 공간은 남성집단에 의해 독점되며 ‘표현’의 내용은 남성 시선/지식에 의해 검열된다. 가령, (헤링이 지적했듯이) 여성들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공격하고 훈계하는 남성들의 ‘표현’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간접적인 ‘검열’이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것일 때 정당하다
여성들을 비하하고 개인정보를 유출하고 성폭력적 언사를 퍼붓는 남성들의 ‘표현’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폭력’이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것으로 주장될 때 그 정치적 의미가 정당화될 수 있는 맥락적 권리다. 만약 이러한 권력관계에 대한 인식 없이 특권집단이 내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을 ‘표현의 자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남성집단의 ‘특권’을 포장하는 나쁜 레토릭이자 ‘범죄를 저지를 자유’(?)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현재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가를 묻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논의의 조건 자체를 되묻는 이러한 시도는, 막 진행중인 논의틀 안에서는 ‘딴소리’나 ‘삼천포’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과감한 논의의 ‘재설정(reset)’이 없다면, ‘표현의 자유’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여성들에게만 딜레마인’ 문제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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