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9호 표지이야기 [네트워커·언니네 공동기획‘정보인권과 여성’]
‘누가’ 함소원의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가

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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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민주노동당의 게시판에는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함소원의 음모노출과 국가보안법’. 제목부터가 다소 ‘선정적’이었던 이 글은 함소원의 헤어누드와 송두율의 김일성 존경 발언이 이 시대의 금기에 대한 진정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이 둘은 “국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이 사회의 금기를 깨려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잣대를 들이대어 이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자유를 국가가 검열하거나 박탈할 수 없다. 맞는 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모든 개인에게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억압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와 사회적 금기에 대한 저항을 말하기 위해 굳이 이 두 사례를 가져와야 했는지 의문이다. 이 둘을 과연 동일한 위치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글에서 보여지는 ‘표현의 자유’의 개념은 지극히 몰성적(gender-blindness)이고 남성중심적이다. 함소원의 표현의 자유를 송두율의 국가보안법과 같은 위치와 맥락에서 사용하는데, 분명히 국가보안법의 문제와 ‘성’과 관련된 표현의 자유는 다르다. 그러나 대부분 표현의 자유에 관한 담론에는 이를 구분없이 사용하며 이에 대해 찬성 아니면 반대로 양자택일할 것을 요구한다. 남성의 관음증의 대상으로서의 포르노, 누드와 같은 선정적인 내용에 표현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는데, 거기에 어떻게 적극 찬성, 동의할 수 있을까. 자칫 이에 대한 우려를 내비치면 표현의 자유를 반대하는 ‘보수주의자’가 되기 십상인 현재 표현의 자유의 논쟁에는 정작 ‘타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어떻게 경계하며 나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인가’의 논의가 빠져있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표현의 자유를 말하는 담론의 주체는 ‘누구’였는가. 표현의 자유를 누드, 포르노의 자유로운 상품화, 합법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주로 남성(소비)주체에 의해 말해져왔다. 마치 이들을 보장하는 것이 ‘모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인 양 말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함소원의 누드로 표면화된 표현의 자유에 관한 위의 글이 불편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글에서 그녀를 지지, 옹호한 맥락에는 여성의 몸이 상품화, 대상화되고 쉽게 폭력에 노출될 수 있는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우려보다, 송두율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처럼 이것도 ‘똑같이’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송두율은 김정일 존경 발언으로 사이버 성폭력을 당하지 않지만, 함소원은 자신의 누드 사진 공개로 사이버 성폭력을 당하고 있다(실제 그녀의 사극 출연이 결정된 이후 남성들의 성폭력적 악플이 무지 만연했다!). 이런 성별화된 구조가 존재하는 게 현실인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성’은 이러한 맥락이 삭제되고 중립적인 가치로 돌변한다. 그들의 표현의 자유에는 성차별과 성폭력, 그리고 다수의 남성들이 함소원의 누드 사진을 마음놓고 ‘볼(즐길)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까지 포함돼 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의 담론은 좀더 다른 내용들로 채워져야 한다. 이제까지 ‘누가’ 표현의 자유를 누려왔는지, 그 담론의 주체는 누구였는지 성찰해봐야 할 것이다. 표현의 자유 담론 속에서 여성은 누드, 성형미인 등 남성의 시선에 맞춰져 있거나 이를 주 대상으로 하는 표현물로 국한되어 왔다. 여성의 목소리는 단지 소수에 불과했고 이들은 사회적으로 용인된 범주 안에서만 말해왔다. 보다 소수자, 사회적 약자에게 평등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서의 ‘표현의 자유’에 관한 주장이 필요하다. 만약 함소원의 헤어누드 투쟁이 남성 주체가 아닌 성인지적 관점을 가진 여성 주체에 의해 말해진다면, 성별화된 여성 이미지가 전복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아마도 기존의 양비론식 사고를 넘어서 여성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다 도발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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