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9호 사이버
누드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

조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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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군위안부 누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마음이 든다. 이승연이라는 개인을 퇴출시키거나, 엄청난 돈을 투자하여 그 기획을 성사시키려 했던 사업체들의 문을 닫게 하면 이 사건은 종결되는 것인가. 그 누드 프로젝트 자체는 막을 내릴 수 있겠지만,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다종다양한 모습들은 오래 지속될 근심으로 남을만한 것들이다.

이승연이 ‘종군위안부’를 테마로 하여 누드를 찍었다는 사실이 인터넷 뉴스에 뜨자마자, 많은 네티즌들은 뉴스 토론장이며 카페며, 열려있는 모든 공론의 장에서 그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이 누드 프로젝트를 막는 것이 마치 민족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인 양 목소리를 드높이고, 또 어떤 이들은 ‘창녀’, ‘걸레’ 혹은 그 보다 더한, 입에도 올리고 싶지 않은 성적 표현이 가득한 욕설로 이승연 개인을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을 숭고하게 격상시켜드리는 것과 일평생 ‘능욕 당했다’는 고통 속에서 살아온 여성으로서의 삶이 치유되는 것에는 아주 먼 거리가 있다. 그리고 역사의식에 대한 그릇된 이해인지 도덕성의 타락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돈 혹은 어떤 종류의 명예를 바라며 자신의 육체를 드러낸 것과 ‘창녀’라고 불리우는 것에도 가늠하기 힘든 거리가 있다.

창녀라는 ‘욕’은, 그 욕을 한 사람들에게 아마도 그것이 ‘여성’을 부르는 가장 모멸적인 단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 인간으로(어쩌면 그들이 그리고 있는 그 어떤 ‘여성’으로서도) 존중해 줄 수 없는, 성(性)을 위한 그 어떤 도구로써의 존재. 이승연을 욕하며 창녀라는 단어를 썼을 때, 더 치욕을 느끼는 것은 누구일까. 이승연일까, 금전을 대가로 자신의 성을 팔아야 하는 성매매 여성들일까. 어느 쪽이건 양쪽 다, 몹시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전철을 타기 위해 신문 가판대 앞을 지나친다. 몇 일전까지 누가누가 또 누드를 찍기 위해 얼마를 받고 얼마나 벗었나를 다뤄 재끼던 스포츠/연예 관련 신문들의 오늘자에는 얼굴을 떨구고 눈물로 사죄하고 있는 이승연의 얼굴이 1면을 장식하고 있다.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자료를 찾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브라우저를 연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어 내려간 종군위안부 누드 관련 기사 바로 아래에는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연예인을 들먹이며 ‘누구누구같은 몸매 만들기’, ‘남자들을 사로잡는 섹시한 그녀’ 등등 여성들을 겨냥한 각종 광고들이 즐비하게 뜬다.

도대체 여성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다종다양한 인식들로부터 단 한순간이라도 피해갈 수 없는 요즘 같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삶일까. 근원까지 파헤쳐 가는 것이 너무나 지난하고 고단한 일이라면, 그럼에도 지금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면, 단지 이 사이트만이라도 관심을 가져보자고 권해본다. ‘여성과 전쟁’이라는 홈페이지 주소마저도 의미심장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의 홈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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