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0호 PC통신
최초의 온라인대중행동과 촛불시위

김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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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BBS와 함께 우리나라 PC통신을 성장·발전시킨 주역은 상업적 PC통신이다. 지금은 인터넷서비스로 변화했지만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등이다. 이런 상업적 PC통신의 출발점은 케텔(KETEL)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PC통신을 본격화한 공은 커넬에 주어야 하지 않을까. 케텔의 초기 전략은 ‘공짜’작전. 돈도 안들이고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용자가 급증했다.

케텔은 92년까지 무료 서비스로 가입자를 늘려나갔다.- 이점은 인터넷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다만 폐쇄형일 수밖에 없었던 PC통신에 비해 개방형인 인터넷은 수익모델을 다양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고, 이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유료화가 가능하다는 점만 다를 뿐. 이용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PC통신의 ‘꽃’인 동호회도 잇따라 등장했다.

이처럼 케텔은 PC통신 발전에 기여한 측면도 있지만 다른 면에서 최초의 PC통신 이용자의 온·오프라인 시위를 만든 주역이었다. 사건 발단은 OS(운영체제)동호회에서 몇몇 회원이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 신제품을 자료실에 업로드했기 때문이다.

이에 1991년 7월4일 케텔의 100여 개 동호회 중 가장 큰 동호회인 OS동호회를 일시 폐쇄했으며, 정보광장을 비롯하여 큰마을 및 OS동호회 게시판에서도 무차별로 아이디와 게시물을 삭제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이용자들이 이러한 회사측의 강제 폐쇄 및 삭제조치에 크게 반발하여 게시판을 통한 시위는 물론 대책모임을 갖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최초의 온라인시위가 아닐까 생각한다.(자세한 사건 전말은 http://www.mediamob.co.kr/infoland)

또다른 사건은 유료화로 발생했다. 한국경제신문사는 PC피시통신에 케텔을 매각하고, 한국PC통신은 1991년에 이름을 KORTEL이라고 바꾸었다. 코텔은 곧 한국통신이 운영하던 HiTEL과 통합하여 명칭을 HiTEL로 변경하고 1992년 4월 1일을 D-Day로 정하여 대대적인 개편작업을 단행함과 동시에 유료화 발표를 발표했다.

KETEL의 유료화는 이용자 입장에서 보면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이용자들은 하나같이 궐기(?)를 호소했고, 당시 KETEL의 게시판과 일부 신문사에서 유료화에 따른 통신인들의 전면적인 반유료화 투쟁(?)을 보도하였다. 또 이용자들은 현재 시스템이 갖추어진 한국피시통신 본사인 혜화전화국 앞에서 매일 오후6시에 무언(無言)의 ‘침목 촛불 시위’를 했다. 그러나 온라인시위와 오프라인행동이 차이가 있음은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때를 회상하는 한 이용자의 글을 보면….

“그러나 즐거웠던 시간은 빨리 지나가고... 며칠간 종로에서 있었던 촛불 시위에도 나가 보았다. 하지만 촛불 시위에 참가했다는 뿌듯함 내지는 보람을 느끼기 보단 갈수록 실망만 더하였다. 게시판에서 손가락으로는 그렇게도 적극적이고 또한 신랄하게 반대의 글을 마구마구 넘치게 쳐넣는 사람들이었는데, 마치 본사 사무실에라도 뛰쳐 들어갈 듯이 글을 쓰던 사람들인데, 정작 시위에 나온 사람은 몇 없었다. 착하고 순진한 중고등학생 열 댓명과 그 외의 몇 명이 초라하게 촛불을 들뿐... 게다가 그마저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갔다. 나 역시 안 나갔다. 사람들은 항상 글로만 언성 높여 유료화 반대요! 무료화여! 망할 놈의 운영진이여! 써 대면서, 실상 행동하는 사람은 없었다.”

PC통신상에서의 ‘활동’이란 즉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글을 많이 쓰고 잘 쓰고 하는 것이 활동을 많이 하고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행동을 많이 하고 수행을 잘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자신의 방에서 혼자서, 다른 사람들 또는 적을 직접 대하지 않고 파란 화면을 바라보며 키보드를 또각거려 글을 쓰는 것은 그다지 큰 의지력, 노력,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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