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1호 사이버
“어디서 들은 건지 기억이 안 난다구?”

조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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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초 여성주의 지식검색사이트인 ‘지식놀이터’를 언니네 안에 오픈한 뒤, 언니네 운영진들은 “어디서 들은 건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이라는 문구를 놓고 심도(?) 깊은 회의를 한 바 있다. 궁금하게 여기는 것들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서로 묻고 답하는 이 사이트에서 “어디서 들은 건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류의 말로 그 대답의 운을 떼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냐고?

이렇게 대답의 첫머리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출처가 어디였는지 정말 알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출처를 알아보려면 알아볼 수 있지만, 귀찮아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거나 ‘이런’ 곳에 답변 달면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 전자의 경우에는 사실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 있다. 지금 당장 답변이 절실한 사람을 두고 “정확하지 않은 거라면 답변으로 달지도 마시오!”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다면 후자의 경우는?
사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의 경우이다. 그 많은 귀찮음의 횟수와 “학술논문도 아닌데, 출처를 조목조목 밝혀줘야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으로 인하여, 사이버공간에서 유통되는 지식(넓은 의미에서의 지식을 말한다)은 그 맥락을 잃고 헤매거나, ‘어디선가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 중의 하나로 평가절하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에게 그 누군가의 말들을 지식으로써 존중하고 체계화시켜본 경험들이 별로 없다는 것에 있지 않나 싶다. 이 때의 존중과 체계화란 상아탑의 높은 곳에 모셔두고 그 권위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현재 접하는 수많은 개념, 이론, 지혜, 그 모든 생각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맥락 속에 놓이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초중등 교육에서는 물론이고 대학 교육에서마저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배우는 경우가 거의 없는 우리의 상황은 너무나 척박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아직은 일부의 흐름이다. 권위로 틀이 지워져있는 학계에서나 가끔 몸살을 앓는 정도랄까.

출처가 어디인지 알고 있지만 일부러 밝히지 않고 내 의견인양 그대로 덮어씌우는 행위는 도둑질이다. 이런 악의적인 도둑질까지는 아니더라도, 출처가 어딘지 잘 알 수 없으니 ‘일단 넘어가자’는 식의 행동이 반복되는 것 역시 큰 문제이다. 특히 언제나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어온, 여성들의 지식과 경험과 삶의 지혜는 그 의미의 무거움을 제대로 인정받아본 적도 별로 없다.

지금 당신도 혹시 그 어딘가의 웹진에서, 블로그에서, 게시판에서 본 그 누군가의 이야기들은 그냥 인터넷에 ‘흘러 다니는’ 것이므로 출처 따위는 밝히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럴 땐 거꾸로 생각해보는 게 좋겠다. 당신이 어딘가에서 밝힌 생각이 전혀 알지도 못할 곳에서 흘러 다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까지 도착했다고. 그 때 물론(!) 당신은 그것에 대해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지닌다. 당신에게 그 생각을 보호할 권리가 있다면, 당신에게는 그 생각에 대해 책임질 의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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