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4호 정책제언
강제실시 활성화를 위한 특허법 개정이 필요하다

양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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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부터 16일까지 태국에서는 세계에이즈대회가 열렸다. 우리 언론에서는 태국 거리에서 콘돔을 나눠주는 행사를 해외화제 정도로 재미삼아 다루었지만, 행사기간 중에 다국적 제약회사의 부스가 붉은 페인트로 뒤덮이는 ‘과격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세계 각국의 AIDS관련 인권운동가, 환자단체들이 환자의 피를 상징하는 붉은 페인트를 통해, 이윤과 경제성만 앞세우는 제약기업에 대해 항의를 표현한 것.

지난해 초 서울, 백혈병환자들이 국가인권위원회를 18일간이나 점거 농성한 사건이 있었다. 보건복지부가 백혈병 치료약인 글리벡의 약값을 2만3천여 원으로 발표하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약값 협상도중 글리벡의 독점제조판매사인 노바티스는 23,045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시장을 철수하겠다는 협박과 함께 글리벡 공급을 일시 중단했었다.

의약품 접근권과 특허의 충돌

이런 문제들은 우리에게 환자의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공중보건의 관점에서 필수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은 ‘의약품의 합리적인 사용’, ‘충분한 재원’, ‘적정(affordable) 가격’, ‘신뢰 가능한 보건 및 공급체계’에 좌우된다. 현재 핵심적 이슈는 약값이다. 이는 특허제도와 밀접히 관련된다. 높은 약값은 특허에 의해 유지되는 독점적 제조판매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허는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을 제한하는 주요 요인이다. 한편, 개발자에게 경제적 보상을 보장하는 특허제도 없이 막대한 비용을 요하는 의약품의 개발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입장에서 보면 특허권은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을 확대하는 면도 있다. 결국, 환자의 의약품 접근권과 제약기업의 특허권을 상호배척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다만, AIDS나 글리벡 사건이 보여주듯 현행 지적재산권체제는 특허권 보호에 기울어져 있고 그 결과 의약품의 접근권은 크게 제약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의약품 접근권이라는 인권보장적 관점에서 양자간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강제실시권과 그 문제점

최근 카타르 도하 WTO 각료회의의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과 공중의 건강에 대한 각료선언’에서도 “회원국이 공중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TRIPs 협정이 방해하지 않으며 방해할 수 없다”는 점과 “공중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특히,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을 높이기 위한 WTO 회원국의 권리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협정이 해석되고 이행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각 회원국은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권리를 가지고 강제실시권을 부여할 조건을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밝혔다.

강제실시란, 특허권자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지 않더라도, 특허권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법률상 당연히 또는 관할 행정청의 행정처분에 의해 실시권을 부여하는 제도이다. 의약품 접근권과 특허권 보장의 조화를 위한 제도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우리 특허법도 특허권의 남용에 대한 제재 조치, 공공의 이익을 위한 강제실시 등의 강제실시제도를 두고 있다. 강제실시를 허용하면 독점공급체제를 경쟁체제로 바꿈으로써 약값의 하락을 유도할 수 있다. 지난해 민중의료연합 등 보건의료단체들이 특허청에 대해 글리벡의 강제실시를 청구했었으나 특허청이 거부한 바 있다.

수출목적 강제실시제도 도입

도하선언문의 구체적 이행을 위해 지난해 8월 TRIPs 이사회는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 도입에 합의했다. 본래 TRIPs 협정 제31조는 강제실시 승인국의 국내시장에 대한 공급목적으로 범위를 한정하고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약품 생산시설이나 기술이 부족한 저개발국가의 경우 강제실시권을 발동하더라도, 스스로 제조할 수 없어 제3국의 약을 수입해야 하는데 수출가능국의 의약품 가격이 특허로 인하여 고가라면, 강제실시권 발동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이 경우 수출가능국도 수출목적의 강제실시권을 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강제실시권의 실효적 보장을 위해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제도의 도입에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와 캐나다는 이미 특허법 개정을 통해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 제도를 수용했다.

우리도 TRIPs 이사회의 결정을 반영하여 수출을 위한 강제실시 제도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전염병 창궐 등 긴급상황에서는 수입국의 지위에서 이 제도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여지가 있고, 수출국의 지위에서 제네릭(복제 의약품) 산업의 활성화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재정에 의한 강제실시제도 보완

또한 현행 특허법은 몇 가지 개정이 필요하다.

(1) 제107조 1항 4호는 불공정거래행위 시정을 위한 강제실시제도를 규정하고 있으나, 이를 위한 구체적 규정이 없다. 공정거래관련법률이나 특허법령에 구체적 요건·절차규정을 둘 필요가 있다.

(2) 제107조는 TRIPs협정 제31조(b)(c)의 ‘public noncommercial use’에 대응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비상업적으로 특허발명을 실시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강제실시를 허용할 수 있다고 하나, ‘national emergency’에 대응하여 ‘국가긴급상황’을 강제실시요건으로 신설함이 타당하다.

(3) ‘비상업적’인 경우로 제한하고 있으나 그 의미가 불분명한데다, 일반적으로 강제실시권자가 발명을 실시하여 제조 판매하는 경우 상업적일 수밖에 없어서, 상호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체계정당성이 의심된다. 따라서 이 문구는 삭제하는 것이 타당하다.

(4) 재정에 의한 통상실시권의 경우 재정권자는 특허청장이다. 그러나 강제실시는 특허권에 대한 제한의 의미를 갖고 있어, 특허권을 부여하고 특허권자의 이익 옹호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특허청이 재정권한을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허청 외에 산업자원부장관이나, 보건사회부장관 등이 재정권한을 행사함이 타당하다.

만일 지난해 글리벡 강제실시가 허용됐더라면 노바티스 글리벡 가격의 약 1/57에 불과한 인도 제약회사의 카피약을 국내 환자들에게 수입, 공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허청은 연구개발비 보존 등을 문제삼았으나, 실상 노바티스는 불과 8개월만에 글리벡의 연구개발비를 초과하는 매출액을 올렸다. 우리 특허법상 강제실시 제도의 적절한 보완을 통해 그 활용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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