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4호 사이버
‘상상이 세상을 바꾼다’

조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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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7일 서울여성플라자에서는 <언니네> 주최로 건강가정기본법 대안 마련을 위한 난상토론회가 열렸다. 2005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는 건강가정기본법은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이루어진 가족구성을 기본으로, ‘건강한’ 가정이 유지되기 위한 관리 체계 및 각종 사업들을 벌이겠다는 것을 기본 골자로 하고 있다. 제목만 얼른 보아도 여기에서 말하는 건강가정이라는 것이, 소위 말하는 정상 가족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길 법하다. 그리고 자세한 내용을 들여다볼수록 그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가족 단위의 복지정책을 개발하고, 건강가정지원센터와 가정봉사원 제도를 만들겠다는 구체적 내용까지 담고 있는 이 법안은, 이혼이 증가하고 가족이 해체되는 현재의 모습 속에서 적절한 상황 판단을 하기는커녕 매우 고루한 방식으로 가족윤리를 고수하고 있다. 토론회에 모인 사람들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가 명백히 얽혀있는 이 법안 자체의 개정/폐지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가족이라는 틀을 통한 복지정책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점차 다양해져 가는 가족 구성의 방식들과 친밀성의 영역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필요한가 등의 심층적인 문제들을 논의했다.

그날의 토론자였던 한 분의 말씀처럼, 역시 문제는 ‘상상력’인 것일까. 건강가정기본법을 둘러싼 논의들은, 우리 사회의 가족에 대해 물었을 때, 부모-자식의 기본 구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상 가족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비혈연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체나 독신 가족 등을 꿈꾸고 있는 이들의 상상력이 여실히 충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자는 후자의 상상력을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위험한 것이라 여길 것이며, 후자는 전자의 상상력을 사회의 어떤 변화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빈곤한 것이라 여길 것이다.

사실 앞으로 발생될 문제들뿐만 아니라 현재의 상황만을 따져보아도 어느 쪽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는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상상을 어떻게 실현시킬 수 있는가가 된다. 가족이라는 범주 안팎에서 아직 이름도 붙여지지 않은 그 어떤 삶들을 어떻게 인식의 수면으로 띄울 수 있을까? 이는 저 건강가정기본법 제정과 같은 상황에서 드러나듯, 개인적 차원에서의 라이프스타일 선택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법제도적 차원에서 인정받고 그 틀 안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기 위한 밥그릇 싸움이 돼서도 안 된다.

적어도 ‘대안’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상상하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무엇 무엇에 반대한다’라는 안티(anti)의 방식, 소극적인(negative) 방식에서 조금 더 나아간 상상력이 필요하다. 물론 ‘반대한다!’는 언설이 때로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도 하지만, 그것 이후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면 그 언설이 되려 빈곤해지는 경우도 많다.

항상 적극적인(positive) 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며 주장을 펼쳐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지향하는 바를 위해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 그리고 그 상상이 내 삶의 모습과 닿아있을 때 좀 더 즐거울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상상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광고 카피에나 쓰이는 말은 아닐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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