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4호 사이방가르드
문화정치의 큐레이터, 아트마크(RTMark)

이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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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커> 1월호에도 소개된 바 있는 ‘크리티칼 아트 앙상블(CAE)’이 현재 미 연방정보국(FBI)에 의해 생화학 테러 혐의로 기소됐다. 미국 정부가 깊게 개입한 세균전 실험 역사를 비판하며, 박테리아를 이용 이를 경고하는 예술 시연이 권력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던 까닭이다. 문제는 앙상블의 주요 구성원들이 예술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이거나 현업 예술가로 이뤄졌다는 점으로 봐서, 이번 사건이 진보 예술계 인사들의 재갈을 물리려는 속셈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행히도 앙상블의 무고를 증명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학계와 문인, 예술계가 저항하고 있고, 한 구명 사이트(www.caedefensefund.org)를 통해 앙상블 기소 사건의 정황을 알리고 변호 기금 마련의 움직임도 있다. 이렇듯 권력과 자본의 횡포와 룰을 거부하며 저항을 폭넓게 기획 사업으로 꾸리면 어떨까?

네트에서 본격적으로 저항 방식을 사업화하여 크게 알려진, 한 사이버 아방가르드 기획 집단이 있다. ‘아트마크(RTMark)’가 그것인데, 이제는 영국 비비씨(BBC) 방송 등에서 이 단체를 특집으로 다룰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아트마크는 온라인 장난감 업체인 이토이즈(etoys.com)와 이 업체가 존재하기 전부터 만들어져 운영되던 스위스의 인터넷 아티스트들의 사이트(etoy.com)간의 도메인 분쟁에서 후자를 승리하도록 도움으로써 서서히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트마크의 사업은 자본에 대한 사보타지를 목적으로 한다. 상업적 투자회사가 아니지만, 이들은 뮤추얼 펀드 모델을 도입하여 기업들의 횡포를 막는 사업들을 기획하고 있다. 환경, 교육, 노동, 언론, 지적 재산권 등의 펀드군을 만들어, 정해진 사업에 기금을 적정 활용하는 것이다. 펀드 매니저들은 각 기금들을 활용하여 저항을 꾸미는 당사자들이다. 물론 투자자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화폐 대신 펀드 매니저가 선사하는 문화와 삶의 향상에 대한 기대이다.

사업의 핵심군은 기획 아이디어, 스폰서, 작업자, 그리고 이로부터 만들어지는 생산물이다. 이 4박자가 맞아떨어지면 사업이 성사된다. 예컨대, 이들의 홈페이지 사업 공고가 누군가에 의해 제시되면 그에 이해 관계를 갖고 있고 자본을 대는 스폰서가 등장하고, 작업을 수행하는 예술가 혹은 운동단체가 기획 생산을 맡아 결과물을 내오는 방식이다.

이제까지 아트마크가 벌인 사업들은, 현실에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저항 방식의 심각성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우선 이들의 장기적 사업 중 하나는, 세계무역기구(WTO), 공화당 대통령 후보 시절의 조지 부시, 오스트리아의 나찌당, 맥도널드 등과 유사한 도메인명을 지닌 패러디 사이트를 제작하여, 이들의 공식 사이트를 비꼰다.

또한 영화 <타이타닉> 제작시 환경 오염의 피해 주민들에 대한 여론화, 고정화된 성역할을 조롱하면서 3천여 개의 바비 인형에 미 해병 인형의 남성화된 음성을 삽입하여 재유통시켰던 ‘바비 해방군’ 사업, ‘사빠띠스따 운동’을 옹호하면서 미 펜타곤과 멕시코 정부의 웹사이트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었던 프러드넷(floodnet)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지원 (지난 <네트워커> 7월호에 소개된 ‘전자교란극장’ 참고) 등이 이제까지 이들이 성공적으로 이뤄냈던 주요 사업 내용이다.

아트마크의 장점은 바로 저항의 유연성에 있다. 이들은 문화적 저항의 전략과 전술들을 다양하고 재치있게 구사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큐레이터’로 불리길 원한다. 기업의 큐레이션이 소비형 인간들을 주조하는데 있다면, 아트마크는 여기에 불만을 지닌 무리들을 긁어모아 창작자로서의 시민을 양성하는데 주력하는 큐레이터다. 이런 큐레이터 개념으로 보면 틀에 박힌 전시공간은 비좁다. 자본 물신형 배치에서 주체형 시민들의 민주적 재배치로 사회를 바꾸는 기획이란 점을 고려하면 구획된 공간은 구속이다. 그래서 그들의 큐레이션은 전지구적이다. 사업의 연계 방식도 전지구적으로 맺어진다. 서로 얼굴도 몰랐던 스폰서, 예술 생산자, 아이디어의 제출자 등이 아크마크의 웹 데이터베이스 기획 목록을 통해 소통하고 저항하는 출구를 찾는다. 하지만 일정 부분 사회 운동의 전망에서 보면 아트마크는 단지 저항을 유희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경향도 내재해 있다. 예술 운동을 자본의 사업처럼 여겨 투자와 사업성과의 관계로 좁혀가다 보면, 애초 취지보다는 가시적 효과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생긴다. 게다가 타자에게 물리적 손상을 유발하는 것을 제한하는 사업 원칙은, 저항의 강도를 더욱 약화시키는 요인이다.

어찌됐건 아트마크의 가치는 크다. 굵직한 디지털 저항 예술의 자금줄이자 이를 재배치하는 통큰 큐레이터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기 때문이다. 기획에 맞는 적절한 자금을 대줄 창작자를 찾고 생산물을 내오는 방식이 그저 큐레이터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이들을 사고한다면, 행동주의적이고 미학적인 방식으로 디지털 창작과 예술 행위를 새로운 판 위에 적절히 짜내는 또 다른 아방가르드 예술 활동을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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