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4호 칼럼
ERP 깔아놓고, 돈벌이 장삿속만 채우려는 병원

이황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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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전북대병원을 시작으로 병원에도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가 들어오고 있다. 산별파업이 끝나고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투쟁하고 있는 서울대병원노동조합의 경우 EMR(Electronic Medical Record: 전자의무기록시시스템), PDC(Patient Data Card: 전자의료카드) 등 병원의 정보화사업을 저지하는 투쟁을 함께 하고 있다. 왜 이들은 병원정보화사업을 반대하는 것일까? 병원정보화사업이라는 것이 대체 뭘 의미하기에 그런가. 현재 추진되고 있는 병원정보화 구축은 다름 아닌 ERP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전북대병원 ERP와 경희의료원의 원가분석시스템을 살펴보자.

전북대병원 ERP는 재무관리(FM), 의료정보관리(EDW), 활동기준원가관리(ABM), 균형성과관리(BSC)로 이루어져있다. 이 가운데 원가분석과 환자와 병원노동자의 모든 정보를 수치화하여 통합분석하는 정보관리는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균형성과관리는 각 과별로 경영목표를 설정하고 목표치에 100%이상 달성했을 때 초록 불, 90%이상일 때 노란 불, 90%미만일 때 빨간 불이 들어오게끔 하는 시스템이다. 이러면 경영진이 언제든지 엔터 키 하나로 과별 경영실적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ERP가 도입되면서 원가절감이라는 명목으로 반창고, 붕대, 1회용 주사기 등도 가격이 매겨지는 동시에 과별로 실적을 체크하기 때문에 간호사들은 자발적인 물품관리자가 됐다. 심지어 1회용 물품을 버리지 않고 물로 씻어 다시 쓰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경희의료원에서는 병상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다른 과 환자라도 병동만 채우면 된다며 마구잡이로 환자를 받는 바람에 7개 과가 같은 병동에 섞여 있었다. 경희의료원에서는 병상가동률이 낮다는 이유로 소아암 백혈병 병동을 축소하고, 중증 환자가 조금만 호전되면 일반 병동으로 보냈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 공장에서 물건 제조하듯 최대한 속도를 내라고 하는 시스템이 바로 ERP인 것이다. ERP시스템은 의사별, 과별로 경영실적을 체크함으로써 과잉진료, 과잉검사를 당연시하고, 장기입원환자ㆍ저수익중증환자ㆍ저소득층환자 치료를 기피하도록 만들고 있다. 5분 진료도 힘든 대학병원에서 3분, 2분, 1분으로 진료시간을 줄여 시간 내에 최대로 환자를 보도록 한다면 환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국가 공공의료기관의 중심인 국립대병원에서 ERP가 시행된다면 국립대병원으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는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환자의 개인의료정보가 병원에 축적된다면 개인의 질병과 관련된 내밀한 정보가 유통될 수 있다. 병원노동자의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하게 되면 근태관리나 경영실적이 차별관리와 평가의 기준이 될 수 있으므로 병원노동자는 늘 보이지 않는 CCTV의 감시를 받게 된다. 병원에서 ERP를 막아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환자는 병원에서 축적할 수 있는 개인정보에 민감하게 자기권리를 주장해야 하고, 병원노동자는 숨막히는 노동자감시를 걷어내고 국립대병원을 의료공공성을 펼칠 수 있는 진정한 의료기관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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