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5호 과학에세이
어떤 전쟁의 유혹

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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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신문을 잘 보지 않는다. TV도 심야가 아니면 좀처럼 만나기 어려우니까, 틈틈이 인터넷 매체들을 뒤져서 그나마 관심있는 뉴스나 가십거리를 챙기곤 한다. 한때는 출근하기 전에 두엇의 신문을 섭렵하고 TV나 라디오 뉴스는 꼭 챙기는 편이었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되었을까? 거의 차별화되지 않는 기사와 뉴스들의 천편일률적인 구성에서 비롯된 식상함 때문이요, 언론 매체들의 끝 모를 선정성에 질린 까닭이요, 믿고 따를만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해서인 듯하다. 심하게 말하면, 신문이나 TV에서 믿을만한 소식은 교통사고나 살인사건 정도인데, 그것도 원인이나 동기 따위는 대체로 추리소설 수준에 머문다.

기술이 갖는 위험성뿐만 아니라 인권침해의 문제가 강력히 제기되고 있는 사안에 대한 보도들도 누가 죽어야 기사가 되는 다른 소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CCTV를 무려 272대나 설치하고서 그것이 무용지물이 될까봐 전전긍긍하던 것은 서울 강남경찰서나 그것을 찬성한 지역주민만은 아니었던지, CCTV 관제센터 개관 4일만에 절도용의자 한 명을 검거하자 도하 언론은 쾌재를 부르며 보도했다. CCTV가 설치돼도 범죄 발생율이 줄어들지 않더라는 다른 나라 사례나 프라이버시와 인권 침해의 측면을 둘러싼 논쟁들이 잠시나마 실종되는 순간이다. 이제 강남구의 CCTV가 그 지역의 범죄를 다른 지역으로 쫓아내 범죄없는 지역으로 만들든지, 가끔 영문도 모르는 좀도둑들이 걸려들어 경찰의 공을 세우든지,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게 생겼다.

한 달 전쯤 나라 안의 모든 지면과 공중파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이른바 뇌졸중 감기약 파동. 명색이 약사면허를 가진 나도 처음엔 미국 FDA의 제조·판매 중지 조치에도 문제의 감기약 성분(PPA: Phenylpropanola mine)을 4년 가까이 더 생산·유통시킨 관계 당국에게 분노하고 손가락질 했으니, 일반 국민들은 오죽했으랴. PPA가 소량으로는 콧물감기약(코 충혈제거제)으로 쓰이지만 더 많은 양으로는 여성들의 다이어트를 위한 식욕억제제로 쓰이며, 제조·판매 중지의 근거가 되었던 예일대학교의 연구보고서에는 “PPA를 고용량인 식욕억제제로 사용할 때 여성에게 출혈성 뇌졸중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 사실과 제조·판매 중지에 대하여 미국에서도 찬반이 엇갈렸다는 것, 유럽의 몇 나라와 우리가 곧잘 뒤따르곤 하는 일본에서는 PPA에 대한 후속 조치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신문에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나중에 관련 자료들을 챙겨보고 나서야 알게 됐다.

그래서 한국 정부의 잘못이 없단 말이냐? 천만에. 다만, 그것이 누구의 잘못이든 신문과 방송은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그저 언론이 수시로 제공하는 ‘쓰레기 만두’와 ‘중풍 감기약’을 각성제로 삼아 사람들이 떼지어 흥분하면 그만이다. 그러는 사이에, 신용불량자는 370만 명을 웃돌고, 자살증가율은 OECD 최고를 자랑하며, 작년 한해만 해도 하루에 8명씩 산재로 죽어갔다. 내 스스로 과학기술노동자임을 자처해왔던 터, 다른 건 몰라도 노동의 문제와 과학기술의 문제만 갖고라도 언론과의 한판 전쟁을 치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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