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5호 사이방가르드
반저작권 예술의 최전선, illegal-art.org

이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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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라는 자본에 영혼을 팔아넘겼고,
소비주의는 종교로 등극했고,
진정한 자유의 의미 또한 잊혀졌다.”

몇 년 전 미 독립기념일 <뉴욕타임즈>에 실렸던 전면광고의 일부 문구다. 광고에는 주식시세표 위로 엄청나게 크고 시커먼 먹점이 반을 뒤덮고, 자본의 제국에서 나라를 구하자는 선언 문구가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이 광고는 ‘애드버스터’란 좌파 디자인 집단이 마음먹고 벌였던 반자본 예술 운동의 일환이다. 이들 단체는 길거리에 넘쳐나는 거대 기업들의 상표나 관련 상징물에 시커먼 먹점을 매겨 자본에 대한 불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예술가들의 이와 같은 현실 개입은 지적 재산권에 대한 문제 제기로 확장되는 추세다. 특히 창작이 모방, 인용, 패러디 등을 통해 성장하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더 창작물 표현의 자유를 위해 지적재산권의 횡포에 대한 맞대응이 필요하다고 본다. 뉴욕, 시카고를 거쳐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불법예술: 기업 지배하의 표현의 자유’ 전시회는 그 대표적 시도다.

그림 전시, 음악 CD와 DVD 영화 편집 제작, 사이트(illegal-art.org) 개설, 전문가 토론회 등 다방면에 걸쳐 저작물의 불법 사용이란 죄목으로 각종 소송 위협에 시달렸던 문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사이트의 운영자이자 불법 예술의 큐레이터인 케리 맥라렌은, 해고 후 백수 생활을 전전하다 홀로 미국문화와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잡지 <스테이 프리(Stay Free!)>를 수년간 발행해온 독특한 인물이다. 그녀가 2002년 가을에 낸 ‘저작권’ 특집 제20호는 본격적으로 불법아트 전시 기획과 맞물려 미 상업주의와 후기자본주의의 사활이 달린 지적재산권의 본질을 파헤치는 결실을 맺는다.

밧줄에 목맨 채 매달린 미키마우스, 허벅지를 드러내고 난쟁이를 유혹하는 백설공주, 매춘녀로 둔갑한 스타벅스 커피의 여신 이미지들, 포케몬 인형에 수음하는 강아지, 바비 인형과 대화하며 이에 빠져드는 한 남성의 광적인 모습, 텔레토비 동산에 아기 햇님을 대신해 등장한 부시대통령, 햇님이 눈에 광선을 뿜으며 텔레토비 동산과 토끼들을 사정없이 초토화시키는 동영상. 한편, 발터 벤야민의 글 <전자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따 만든 다큐멘터리는 영화 상영전 미연방정보국의 무시무시한 복제 금지 문구들만 모아 보여줌으로써 저작권문화의 한심함을 폭로한다. 음악에선 다른 음원들을 무단 샘플링해 문제가 된 네거티브랜드, 비스티보이즈, 퍼블릭에너미, 더 버브(The Verve) 등 유명 가수들의 관련 곡들을, 개설된 사이트를 통해 접할 수 있다.

이들 기발한 ‘불법’ 작품의 공통점은 한가지다. 순도 100%의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하는 창작물의 권리를 무단 도용한 혐의다. 하지만 표절, 모방, 복제의 낙인은 섣부르다. 사용된 타작가의 작품이나 기업 이미지 등은 패러디되어 주로 정치적 표현의 소구 장치로 쓰인다. 오만방자한 권력의 상징물들을 가져다 재해석한 죄밖엔 없는 것이다.

이는 국내 옴니버스 영화 <묻지마 패밀리>의 ‘내 나이키’ 마지막 대목과 비슷한 정서다. 나이키를 동경했지만 살 능력이 없던 한 아이가 결국은 나이키 상표를 복제하는 법을 깨쳐 집안 식구들 모두에게 나이키 상표를 붙여주던 영화의 마지막은 나이키 권력을 ‘엿먹이는’ 유쾌한 조롱이자 반란이었다.

갈수록 문화계의 패러디와 비판의 영역이 저작권자들에 의해 불법과 표절의 딱지로 취급되고 그 건강성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그녀가 기획한 불법예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미 불법예술에 전시된 기획물들이 수많은 저작권 위반 소송에 시달린 전력을 갖거나 법정 투쟁 중인 것들이 대부분인 점을 고려하면, 젊은 여성 예술 기획자, 맥라렌의 용기가 부럽다. 저작물의 ‘정당한 이용’에 대한 권리, 더 근원적으로 또 다른 창작을 위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작지만 힘있는 맞대응인 셈이다. 사리분별없이 사방에 흉기를 휘두르는 거대 자본들 아래에서 불법예술은 또 다른 자유의 숨구멍이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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