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5호 만화뒤집기
어떻게 관계를 설정해야 할까
사사키 노리코, <닥터 스크루>와 <헤븐>

김태권  
조회수: 3221 / 추천: 46
‘공상’이 아니라 ‘과학’ 공부 좀 해보겠다던, 그렇고 그런 소싯적의 일이다. 어느어느 조직에 투신하였다는 양반의 말인즉 - “교수는 지배계급의 사상을 전파하니까 부르주아지입니다.” 나는 궁금해져서 물었다. “교사는요?” “허허! 교사야 당연히 노동계급이지요.” “그럼 교수는요?” “교수는 부르주아지라고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그 명석한 양반과는 그 다음부터 상면할 일이 없었거니와, 교수노조 설립이라는 일대사건은 그로부터 3-4년 후에 일어난 일이다.

학교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학교를 졸업한 후 사장과 피고용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필연의 왕국’ 너머 ‘자유의 왕국’에서는 이 관계가 좋기만 할지는 몰라도, ‘자유민주주의만도 못한’ 이 한국사회에서야, 그 난감함은 자못 크다.

나는 교수를 적대시하던 그 많은 동기들과 선배들을 기억한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로, 교수와 친한 ‘말 잘 듣는 어린양들’을 경멸하던 그들의 눈초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당당하고 하얗던 목련처럼, 불안하되 설레기도 했던 사춘기처럼, 그들 대부분의 적개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귀순’하고 ‘전향’할 수 있었을까? 서슬 퍼렇던 분노가 새하얗게 타올라 백기가 되어 버린 것일까?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면서, 훗날 다음 세대를 보고 “너희는 너무 극단적이야”라고 말하고 앉을 수 있을까?

사사키 노리코의 세계는 아기자기하다. 비수(肥瘦)가 없는 가는 선으로 묘사된 인물들은 언제나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나름대로 성격과 들어맞아,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세계관인데, <닥터 스크루>에 나오는 교수와 학생, <헤븐>에 나오는 사장과 직원의 관계는 공감이 가는 바가 있다. 서로 적대하는 것도 아니지만, 순종하고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들 사이에는 일정한 긴장과 갈등이 있지만, 또 서로 내쳐버릴 수는 없는 심정도 있다.

교수가 학생을 아끼고 사장이 직원을 위하며, 학생은 교수를 따르고 직원은 사장을 믿는, <김태랑>이나 <시마과장> 따위 마초물의 역겨운 거짓말은 없다. 그렇다고 교수와 학생, 사장과 직원 사이의 서로 화해하지 못할 적개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상인보다 조금씩은 괴짜인 사람들끼리, 조금은 치사하고 약간은 얄미운 이야기들이다. 계급적대에 대해 고민하다가 부잣집 종손에게 담배나 뜯어먹고 치열한 고민 끝에 시장 구석에 반찬가게를 차리는, 염상섭 <삼대>의 나이브한 삽화들보다 아주 약간 더 나이브하다.

그래서일까? 사사키 노리코의 만화는 열혈도 없고 기복도 없고 억지도 없는, 그리하여 극과 극을 오가지도 않고 백기투항 따위도 없는, 그래서 재미있으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또한 그리하여, 90년대 후일담 문학에 나올 법한 젊은 날의 치기랄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랄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한결같고, 또 오래간다. 마치 등장인물들의 무표정한 표정이나 동세없는 자세처럼. 이것을 여운이라고 불러야 할까? 사사키 노리코의 만화는 현실을 더 잘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