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2호 칼럼
노동자들은 진정한 '정보화'를 원한다

윤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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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기표와 기의가 동시에 인간의 인식구조 안에서 상호 작용하여 그 효용을 발생시킨다. 그런데 간혹 발화자와 청취자 간의 의사소통과정에서 같은 기표를 다른 기의로 해석함으로서 의사표현의 불합치가 생기기도 한다. 또는 처음부터 이러한 혼동을 목적으로 하여 다른 이들로 하여금 전제오류의 논리를 정합적인 논리체계로 오인한 채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주로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이다.
이 경우의 대표적 사례가 노무현 대통령이 진대제 정통부장관을 내정하면서 그를 '전문가'라고 규정하고 그에게 신임을 보냈던 사건이다. 진대제장관은 삼성전자의 전문경영인으로서 분명 IT 분야의 전문가이다. 그러나 IT분야의 전문가라는 사실이 곧 국정수행을 위한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문가'로서 장관에게 필요한 자질은 국정수행능력이다. IT분야의 전문성은 정통부라는 특정한 공공기관이 수행해야할 업무관계에 있어서 파생적으로 필요한 분야일 뿐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정통부가 가지고 있는 외연상의 특성과 진대제 장관의 IT 전문성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그에게 '전문가'라는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는데 성공하였다. 현재 그 '전문가'는 기술분야에만 관심을 집중시킨 나머지 '인터넷 게시판 실명제', '위치추적장치 이동전화 의무장착 법제화', '정통부 직원에 사법경찰권 부여' 등의 정보화 정책을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결국 모두 폐기하는 독특한 전문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말장난을 잘 하는 부류 중에 기자가 있다. 기자들의 언어유희는 과거 권위주의 통치시기에 정권의 폭력을 회피하면서도 대중에게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그런데 요즘 기자들 중에서는 언어유희 자체에만 몰두하여 자신이 쓴 기사가 어떠한 팩트를 보여주고 있는지조차도 분간하지 못한 채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7월 4일 인터넷 한국경제신문에 실린 한 기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제목부터 섹시하다. "노동계 '안티정보화' 거세다"! 무슨 기사인가 했더니, 병원노조가 ERP 도입을 반대하면서 파업을 준비하고 있고, 전교조가 NEIS 폐기 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화물연대가 전자입찰제도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안티정보화' 현상으로 규정한 것이다. '전산화'가 곧 '정보화'라고 착각하고 있는 기자의 몰상식은 우습기까지 하고, '안티정보화' 운운하면서 마치 노동자들이 유령의 추억이 되어버린 산업혁명 당시의 러다이트 운동을 21세기에 부활시키려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노동자들을 모욕하는 행위에는 말문이 막힌다. 더불어 이 기자는 한 교수의 입을 빌어 "사회전반의 정보화는 필연적"임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들의 반발을 "정보화 자체를 막으려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궁금한 것은 이 기자가 IT 산업 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한 몫을 하기 위하여 '정보화'라는 단어의 다의성을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인지 궁금하다. 전자라면 기자는 노동자들이 '정보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산화'에 따른 인권침해를 거부하는 것임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후자라면, 미안하지만 기자는 좀 더 성심껏 공부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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