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6호 사이버
기술의 남성권력화에 대해 사유하다 - 둘

권김현영  
조회수: 2338 / 추천: 47
아마 짐작했겠지만, 출발선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최신의 기술일수록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덜 차별받을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의 또 다른 장벽 앞에 무너졌다. 정보기술을 익힌 여성들이 더 많은 고용기회를 얻기는 했지만, 여성을 위해 새로 창출된 직업들은 소프트웨어 생산이나 시스템 분석, 시스템 엔지니어링과 기술관리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저급한 기술수준이 요구되는 데이터 조작행위(자동화 업무나 사무직)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위에 언급한 전문적 기술을 습득하고 그에 따른 직업을 구한 여성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여성들은 조직 내에서 기술전문가로서의 위상과 역할을 가지고 일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어렵게 기술을 익혔지만, 대기업들이 차츰 컴퓨터 서비스 부분을 용역의 형식으로 고용하여 자체 조직을 줄이면서,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태풍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문직 여성들의 기술은 아웃소싱 된 하도급 업체들이 공유하는 소규모 전문 인력 뱅크 안에서 다시 평등하게 경쟁하고 노후된 기술자를 도태시키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생존경쟁은 승진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을 겪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신기술을 가진 여성들일 경우 직장을 찾는 건 용이하나, 그 기술을 가지고 조직의 핵심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또한 기술이 발전하고 시장에서 안정화되고, 고용시장의 수요공급이 형성되기 시작한 다음에는 ‘더 어리고 더 뛰어난 여성들에 의해 재빨리 교체 당하지 않을까’하는 고용불안정의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여성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신정보기술을 익힌 남성들 역시 기술직이 가지는 한계에 부딪히고, 파견회사에 취직하여 기술보따리 장사를 하고, 소규모 전문인력뱅크 안에서 최신의 기술을 습득한 신규사원에게 밀려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테헤란 벨리에 나온 수많은 IT 기업의 남성 CEO들이 대기업의 핵심간부로서 가진 정보와 자원을 통해 이런 파견회사들을 직접 차리거나, 기술집적형 소규모 전문가 집단을 경영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과 남성지배는 신기술 앞에서도 여전히 끄덕없이 재생산된다. 계급권력은 재산, 조직, 기술이라는 세 가지 자산을 획득하는데서 나오는데 여성들은 기술을 획득한다고 해도 조직이라는 자산 자체가 남성적인 결속(흔히 남성인맥관리방식인 ‘올드보이스네트워크’라고 불리는)을 전제하고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신정보기술은 그 기술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가부장제의 작동원리를 배워가고 있다. 여성들이 획득한 신정보기술들은 자급자족하는 일차적 목표는 달성하게 했을지 모르나, 거기에서 한 발자욱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단단한 남성동맹의 사슬에 여전히 묶여있다.

기술권력의 담론조작에 기가 꺾이고, 실리를 우선했다가 남성동맹의 눈꼴사나운 모습만 목도하게 된 나는 짐짓 저주를 걸어본다. 기술의 권력화는 인간소외를 더욱 앞당길 것이며, 이때 사슬에 묶이는 건 여성만이 아닐 것이라고.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