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7호 영화
끌리지만 버려야 할 아까운 사람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something’s gotta give)

이현정  
조회수: 3826 / 추천: 54
야심한 시각, 파자마 차림의 한 극작가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잘 써지지 않는 글을 고민한다. 동시에 난데없이 끼어 든 딸의 남자친구 때문에 자신의 무사하고 평온한 삶이 일렁이는 묘한 변화를 감지한다. 이때 “띠링”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메시지 창이 뜬다. “안 자나요? 배고프지 않아요?” 이 메시지들은 같은 지붕 아래, 걸어서 열 발걸음도 채 안될 다른 방에서 날아온 것이다.

50대 후반의 에리카 배리는 성공한 중견 극작가다. 새 작품을 쓰기 위해 별장에 온 그녀는 딸의 남자친구가 자기 또래인 늙은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강인하고 지적이고 현명한 그녀가 능구렁이 같은 그를 좋아할 리 없다. 서른이 넘은 여자는 상대하지 않는 성공한 음반업자 해리 샌본은 새로 공략하는 어린 여자친구를 위해 비아그라를 먹었다가 심장발작을 일으키고,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어머니 별장에 머무르며 요양을 해야 했다. 싱싱한 것을 좋아하는 그가 원숙한 에리카와의 대화가 즐거울 리 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마 뉴욕의 길 한복판에서 만났다면 서로를 혐오하며 헤어졌을지도 모르는 두 사람, 해변을 함께 산책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더니, 강해 보이는 에리카가 실은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고,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구는 능구렁이 해리가 실은 말주변 없는 소년처럼 머뭇거린다는 것을 서로 알게 된다. 대화가 즐겁고 함께 있는 시간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을 발견한다는 것, 남들은 모르는, 아니 자신조차도 몰랐던 면모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 에리카와 해리에게 그런 경험은 생전 처음이거나 너무 오랜만이라 솔직하게 다가서기 쉽지 않다.

한 지붕 아래 열 발걸음도 채 안될 거리에 있지만, ‘뭐, 어쩌라구.’ 에리카는 써지지도 않는 글을 쓴답시고 컴퓨터를 펴고 앉아있고, “띠링” 해리의 메시지를 받는다. 마치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오랜 친구들의 반가운 해후라도 되듯 그들의 대화가 컴퓨터를 타고 오고간다. 그리고 파자마를 입은 채 부엌에서 만난 그들은 팬케이크를 만들며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 딸의 예상치 못한 방문에 그 즐거움은 급속히 어색해졌지만, 둘 사이의 기류를 눈치 챈 딸은 해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엄마를 격려해준다. 에리카와 해리는 이제 주저할 이유가 없다.

야심한 시각, 잠 못 이루고 앉아 있던 해리가 마치 사랑에 처음 다가설 때처럼 머뭇거리며 컴퓨터를 켠다. 간간히 끼어드는 생각을 애써 물리치며 분주하게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던 에리카는 “띠링”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뜬 메시지 창을 보고 놀란다. “안녕, 잘 지내요?” 일면 반갑고 일면 망설여지는 그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답을 보낸다. “당신도 잘 지내나요? 해리가 별장을 떠난 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고 둘은 멀리 떨어져 있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해리는 예전처럼 부담없이 젊은 여자들과 어울리고 에리카는 해리와의 일을 희곡으로 써서 대성공을 거둔다. 처음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에 미숙했던 이들은,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미숙하다. ‘뭐, 어쩌라구.’
의례적인 인사말이 오간 후에 해리는 키보드를 두드린다. “I miss y............” 문장을 맺지 못하고 한참을 멈칫한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에리카는 회신이 잠시 끊어지자 작정한 듯 빠르게 키보드를 누른다. “미안, 나 급히 나가봐야 되요. 안녕.” 해리는 맺지 못한 문장을 천천히 아예 지워버린다. 컴퓨터를 통한 통신은 행간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선뜻 주기도 하는 반면, 지금처럼 행간의 표정이 영영 키보드 밑으로 숨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모니터에 뜨는 문자들은 눈빛이나 목소리, 손의 떨림 같은 중요한 표현들을 하나도 전해주지 못한다. 컴퓨터 메시지를 통해 급속히 진전된 듯한 둘의 관계가 컴퓨터 메시지를 통해 급속히 차단되었다.

야심한 시각, 파리의 다리 위를 서성이던 해리는 급히 달려와 멈춘 택시에서 내려 다가오는 에리카를 본다. 생일을 파리에서 보내자고 해리와 약속했지만 에리카는 젊고 매력적인 의사 줄리안과 함께 있다. 해리는 사업체를 모두 정리하고 방랑하다가 에리카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파리에 와서 에리카를 찾는다. 초로의 캐릭터들을 깔끔하고 코믹하며 경쾌하게 표현한 이 영화는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 그리고 늙은 여자와 젊은 남자 등의 여러 연령과 성별의 조합을 보여주는데 물론 초점은 중년이라기에는 노년에 더욱 가까운 두 사람에 맞추어져 있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끌렸지만 잘 되지 못하고 헤어져 버린 해리 대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줄리안의 구애에 적당히 넘어가 있던 에리카, 평소 흠모하던 극작가에게서 여성으로서의 매력까지 단박에 발견해버리고 진정으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는 줄리안(영화 속에서 드러난 것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줄리안은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하고 매력적이며 성실한 파트너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역사란 자신이 사귀어 온 젊은 여자들의 목록이 전부이다시피 하지만 정작 지금은 역사에 외면 받고(그는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고 하지만 대부분 그를 냉대하고 싫어하며 피한다) 마지막으로 에리카를 찾아온 초라한 해리. 영화의 해피엔딩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듯, 해리와 에리카의 포옹으로 끝난다. 멋지기 짝이 없는 줄리안은 막판에 쓸데없이 쿨 해져서 에리카를 해리에게 보내준다.

나는 다른 결말을 하나 상상한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라며 에리카는 해리의 오래된 습성을 지적한다.

‘해리 당신은 이제껏 만나왔던 여자들을 상대하는 방식말고는 진심을 담아 소중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모른다. 내가 그것을 가르쳐 줄 것을 기대하지 말아라. 나는 당신의 삶과 사랑의 의미를 찾아 줄 의무보다는 내 자신의 삶의 가치를 추구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해리, 가끔 메시지 보내요. 당신과 대화할 통로는 언제든지 열어두겠어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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