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네트워커> - 정보화에 대한 다른 시각
18호 기획
21세기 한국,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신음하는 IT 노동자
재벌 독점과 불공정한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원인

오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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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당 평균노동시간 57.8시간, 6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하는 노동자가 43.4%, 80시간 이상의 초장시간 노동을 하는 노동자가 7.6%, 임금체불 34%, 시간외 근무수당 지급 8%, 퇴직금 지급 40%, 4대 보험 가입 20% 미만, 년월차 휴가를 이용하는 노동자는 20-30% ...

이것은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6-70년대의 청계천 공장의 상황이 아니다. 바로 21세기 한국의 가장 번화한 거리, 최첨단 IT 산업의 본거지인 테헤란 밸리의 고층 사무실에서 일하는 IT 노동자의 현실이라면 믿어질까? 사실 이 판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 뻔한 얘기이다. 다만, 언젠가 벤처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꿈과 그들은 밤새며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데올로기로 문제가 은폐되어 왔을 뿐.

지난 10월 24일,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이하 IT 노조)이 개최한 “정보통신산업 노동자 실태조사 발표 및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기자회견”에서는 IT 산업에 대한 기존의 허상과 환상이 낱낱이 발가벗겨졌다. 이 실태조사는 IT 노조 홈페이지(http://it.nodong .net)를 통해 지난 3월 9일부터 7월 10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총 1081명의 노동자가 참여하였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IT 노조는 이와 같은 열악한 노동환경의 이면에 국내 IT 산업의 대기업 독점과 다단계식 하도급 구조가 있다고 지적한다.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은 패키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나 워드 같은 독립적 소프트웨어 상품)의 경우 외국 기업이 시장의 85.5%를 점유하고 있는 반면, 국내 기업은 구매 고객의 요구에 맞게 특정한 시스템을 구축해 주는 시스템 통합(SI) 산업에 편중되어 있는 불균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그나마 국내 SI 시장의 대부분은 삼성 SDS, LG CNS 등 재벌 계열사들이 독점하고 있다. 공공부문에서 조차 2002년 10대 기업의 시장점유율이 72%에 달하며 특히 삼성 SDS와 LG CNS의 수주 총액이 전체 물량의 60%에 이른다고 한다.

이와 같은 독점적 구조 속에서 소규모 SI 업체들은 그들의 하도급 업체로 위치지워져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갑을병정무’ 식의 다단계 하도급 구조가 다시 소규모 SI 업체들의 목줄을 옥죄고 있다. 즉, 원 발주자는 계약서 상 ‘갑’이 되며, 대형 SI 업체들은 원청업체인 ‘을’이 된다. 이들에게 다시 하도급을 받는 업체는 ‘병’, 그 다음은 ‘정’이 되는 식이다. 그런데, 대형 SI 업체들은 직접 관리하는 10여개의 전략적 협력업체를 제외한 하도급 업체와 직접 거래를 인정하지 않고 반드시 전략적 협력업체를 통해 거래하도록 함으로써 대부분의 소규모 SI 업체들은 사실상 3차 이상의 하도급 업체로 전락한다.

단계가 많아질수록 수주 단가는 더욱 떨어진다. 총 수주단가에서 원청 업체인 대형 SI 업체는 10~30%를 공제한다. 다시 전략적 협력업체가 3~15% 공제한 나머지가 2차 하도급 업체가 받는 단가가 된다. 원래 수주단가가 1억이라면, 6~7000 만원 정도에 일을 하는 셈이다.

하도급의 차수가 늘어날수록 소규모 SI 업체의 비용효율화 압력은 증대되며, 이는 그대로 이 업체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노동강도 강화로 이어지게 된다. IT 노조의 실태조사에서도 도급 단계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저임금을 받고, 월평균 휴일수가 적었으며 노동시간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재벌 계열사의 평균 연봉이 6.2년 경력에 3,400 만원대의 임금 수준인 반면, 5~6차 하도급의 경우 4.4년 경력에 1,900만원대의 임금 수준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연결고리의 마지막에는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노동자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로서의 지위는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전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결국 재주는 소규모 SI 업체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넘고, 돈은 대형 SI 업체들이 챙기는 꼴인 것이다.

IT 노동자의 불안한 현재와 미래

이런 환경에서 IT 노동자의 현실과 미래는 모두 불안하다. 조사 결과 평균 근속연수는 3.8년, 현직장 근속년수는 1.42년 직장이동횟수는 2.63번으로 나왔다. 직장을 옮긴 이유도 회사가 망하거나, 월급이 체불되어서, 회사가 어려워서 라는 답변이 42%로 심각한 고용 불안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40대 이후에 비관련 분야에서 근무하거나 창업하겠다고 한 사람이 43%로 IT 노동자가 바라보는 미래 역시 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태조사에 응답한 노동자의 70% 이상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로 임금 인상과 근로조건의 개선을 뽑았다. 이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바로 노동기본권을 보장받는 것. 정보사회의 기반이 되는 IT 산업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자율과 창의성에 기반한 새로운 노동이 아니라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기반한 6~70년식 착취인 것이다. IT 노동자의 인간적 삶은 고사하고, IT 강국 한국의 미래는 밝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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