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ck! 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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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가 2000년 대한민국의 중요한 화두임에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온나라가 정신이 팔려 있는 '벤처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에게 정보화란 그저 경쟁력의 하나, 재산증식의 수단으로만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정보화에 대한 목소리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진보네트워크센터에서는 조금이나마 이런 목소리들이 만나고 토론될 수 있기를 바라며 'Hack! Cyber' 칼럼란을 마련하였습니다. 사회운동 각계에서 정보화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해 온 분들, 각 지역의 정보통신활동가들,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들과 네티즌들이 서로 어우러져 의견을 나누는 장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게재를 원하시는 분은 글을 써서 운영자에게 보내주십시오. 검토후 실어 드리겠습니다.
* 일부 칼럼들은 인터넷 한겨레와 공동으로 연재합니다.

열린한글 프로젝트는 계속될 수 없는가?



김현우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아래아 한글(이하 '한글')의 새 버전인 "워디안" 시험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글' 사용자들로서는 목빠지게 기다린 일이다. 지난 98년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발매했던 "815"버전과 다음해의 "국제판"이 '한글97' 버전에서 약간의 기능 개선에 불과했음을 생각한다면 "워디안"은 만 3년만의 정식 업그레이드 버전인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글과컴퓨터 측에서는 버전-업에 부응하는 다양한 새 기능이 추가되었을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의 골격 자체도 상당히 변화했음을 선전한다. 예를 들어 엑셀 프로그램의 표와 '한글' 문서의 표를 연결해서 사용하는 문서연결(OLE) 기능이 포함되었고, 훈민정음, MS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PDF 등 다양한 문서양식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한글'이 취약했던 표 편집 기능을 개선하여 표 속에 표를 그릴 수 있게 했고, 용지가 허용하는 한 최대의 다단편집을 구현할 수도 있다. 글자속성도 더 확장되었고 잘못된 편집을 복구하는 '되돌리기(undo)'도 비로소 제대로 가능해졌다.
반가운 일이다. 기실 이 정도 기능은 타사의 워드 제품들과 비교할 때 무척 아쉬운 것이었다. 역으로 이는 이제까지 몇 년간 '한글'은 심각한 기술지체를 겪어왔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렇다면 돌이켜보자. 우리는 왜 '한글'을 써왔는가

우리는 '한글'을 사랑했다.

'한글'은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한국인이 최초로 대중적으로 사용하게 된 문서편집기였다. "하나 한글" 등 기존의 워드 제품군과 비교할 때 90년경 발매된 '한글 1.5' 버전은 명실상부한 위지윅(wysiwyg) 환경을 구현한 환상적인 프로그램이었고, 이때부터 문서편집기='한글'의 등식이 성립했다. 대폭 개선된 편집기능과 함께, 한글의 구성원리를 그대로 반영한 조합형을 채택했다는 것도 미덕이었다. 세계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가 뚫지 못한 워드 시장은 한국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98년, 한글과컴퓨터의 경영위기가 닥쳤다. 오피스 제품군이나 인터넷 사업 확장 시도가 일정하게 난관에 봉착하던 와중 마이크로소프트가 한글과컴퓨터 경영권 인수의 뜻을 비추었고, 이것이 언론에 보도되자 대대적인 반대 켐페인이 벌어졌다. 우리 말을 담는 틀을 평판나쁜 외국기업에 쉽사리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민주노총은 한컴 매각여부와 상관없이 조직 내에서는 '한글'을 계속 표준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한컴이 매각 교섭을 철회하면서 경영타개책으로 발매한 1만원짜리 "815" 버전은 그야말로 날개돋힌 듯 팔렸다 -- 아니 고객들이 열심히도 사주었다. 한컴이 국민기업이라서 그러했던가? 아니다. 이용자들은 '한글'에 익숙했고 길이 든 만큼 사랑했다. 더 이상 '한글'은 한글과컴퓨터의 것만이 아니었다. '한컴'이 아니라 '한글'이 이대로 소멸해서는 안되었던 것이다.

확 달라진, 혹은 확 이상해진 '한글'?

그런데 이 "워디안"버전에 대하여 벌써 많은 우려들이 쏟아지고 있다. 메뉴는 잘 뜨는데 좀 쓰면 에러가 난다거나 '한글97'과 호환이 잘 안되는 등 기본기능과 안정성에 문제점이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3년만의 업그레이드판치고는 왕실망이라는 것이다. 한컴에서도 이런 문제들을 인정하고 정품 출시를 10월로 연기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상의 결함보다, 뭐하러 이런 업그레이드를 했냐는 타박까지 나오는 게 문제다. 한마디로 MS워드를 너무 베낀, "무늬만 '한글'"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터페이스의 문제도 있지만, '한글'이 자랑으로 내세우던 조합형을 버리고 MS와 같이 완성형 유니코드를(그리고 MS윈도우즈의 드라이버를) 채택했다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한글'로서는 인터넷 환경에서의 표준이 고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니코드의 150만자를 채택하여 "?c방각하"는 물론 모든 한글고어를 표기할 수 있더라도, 조합형을 버린 '과학적 원죄'는 간과될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윈도우즈가 아닌 예컨대 리눅스 환경에서라면 더욱 우려스러운 것이다. 현재 R4 혹은 R5라는 이름으로 리눅스용 '한글'이 출시되어 있지만 이는 온전한 리눅스 프로그램이라기 보다는 윈도우즈용 한글을 리눅스로 포팅한 불완전한 형태일뿐이다. 그런데 '한글'이 유니코드와 윈도우즈 드라이버를 채택한다면 결국은 MS 윈도우즈가 변화하는대로만 '한글'도 쫓아가게 될 것이며, 리눅스용 한글편집기는 그보다 두 발 뒤쳐져 따라가야만 할 것이다. 한글 독립은 허구적 해방(815!)에서 중단되어 버렸다.

'열린 한글' 프로젝트를 다시 생각한다

MS워드에 대한 경쟁력 부분도 비관적이다. MS워드와 비슷해진다면 차라리 '한글'대신 MS워드를 사용하는게 여러모로 '합리적 선택'이다. 여기서 인터넷 포털이나 오피스 패키지를 강화하든 어쩌든 한컴의 경영문제는 우리 관심사가 아니다. 그 CEO가 이찬진이든 전하진이든 마찬가지다. 문제는 우리 말을 제대로 소화하고 대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지난 98년 한컴의 경영위기 때 제안되었던 "열린 한글 프로젝트"를 문득 떠올린다. 한컴이라는 회사를 살리는 것 보다 우리나라 이용자들의 공동자산인 한글편집기를 제대로 공유, 개발하여 살리는게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생각아래 오픈소스 ?澎邦 개발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한글문서편집기의 개선 문제에 더하여, MS 윈도우즈 이외의 운영체제(O/S)에서도 작동하는 한글편집기에 대한 욕구로 인해 더욱 설득력을 가졌다. 오픈소스 운영체제에 오픈소스 문서편집기 개발운동을 벌이자는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그러나 초창기의 활발한 제안과 의욕과는 달리 지금 이 프로젝트의 주체는 거의 다 흩어져버렸고, 매우 초보적인 시험판 말고는 이렇다할 성과물도 남은 것이 없다. 열린 한글 프로젝트 사이트(http://my.netian.com/ ~openhwp/)만이 폐허처럼 떠있을 뿐, 공식 사이트(www.openhwp.org)는 흔적도 없다.
스톨만의 가르침은 공허한 메아리인가. 우리 말 문서편집기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오픈소스 운동이 어떤 이름값을 할 것인가. 좀더 실용적으로 말해, 지금 같아서는 별로 쓰고싶지 않을 워디안을 기다리느니 열린 '한글'을 어떻게든 다시 이야기할 때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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